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침공 (문단 편집) ===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 5월 19일, 마침내 할더는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에게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자유로운 진격을 마침내 승인받았다. 할더는 벨기에 방면의 16기갑군단과 39군단의 지휘권을 [[헤르만 호트]]에게 넘겨 기갑군 규모의 기동부대를 편성했고, B집단군이 격렬한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붙들어 둔 사이 기동부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이 진격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혈통 좋은 명마가 기수에게 고삐를 잡혔다가 갑자기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해 승리한 듯한 느낌이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로, 호트 기갑집단은 아라스로 격렬히 질주하며 연합군의 후방에 쐐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다만 이 과감한 진격으로 인해 기갑집단의 선두와 후위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는데, 특히 아라스 일대에서는 폭 40km 정도의 회랑이 형성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이 일대를 친다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문제는 이 순간에서조차 연합군은 그 찬스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5월 19일, 가믈랭 장군은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르주 장군에게 독일군 제대의 간격으로 '''기동성을 갖춘 특수 임무 부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령문에 적힌 요구 사항은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 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뿐이었다. 문제는 이 날 가믈랭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이강]]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 베이강 역시 1차대전식 전쟁관의 소유자였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믈랭의 즉각적인 역습 지시를 취소해 버렸다. 5월 20일, 독일군이 이미 솜 강 하구의 아브빌(Abbeville)에 이르렀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명령 취소 뒤 베이강이 한 일은 신임 내무장관 예방, 벨기에로 직접 날아가서 군 사령관/벨기에 국왕 예방이었다.] 한편,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영국 원정군 총참모장 에드워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아라스 전차전|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해 아라스 일대에서의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이언사이드는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 참고로 스톤(Stonne) 전투에서 B1 전차 1대를 이끌고 독일군 전차 13대를 격파한 피에르 비요트가 이 사람의 아들이다.][* 이 와중에 아이언사이드가 역습에 소극적인 비요트의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을 방문해 역습 계획에 합의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1개 기갑여단이 증강된 영국군 2개 사단과 프랑스군 2개 사단, 거기에 1경기계화사단을 다시 배속받은 기병군단이 포함된 대대적인 반격이었다. 앞선 안뉘 전차전에서 양군의 교환비를 생각하면, 이 작전은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비요트와 1군 사령관 블랑샤르는 작전의 전권을 5군단장 알트메어 장군에게 위임했다. 그런데 아이언사이드와 알트메어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이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언사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5월 21일'''에''' 공세를 시작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블랑샤르는 알트메어에게 5월 21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고 기재한 명령문을 보냈고, 알트메어는 5월 22일에나 준비가 완료된다고 보고한 것이다. 결국 5월 21일의 [[아라스 전차전|아라스 역습]]은 사실상 영국군 단독 작전이 되어버렸고 제 7기갑사단의 1차 방어선을 돌파하고 항상 전선에서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롬멜과 7기갑사단을 몰살시키는가 했지만 88mm대공포를 동원해 방어선을 급조한 7기갑사단과 슈튜카의 폭격에 처참히 패배한다. [* 한편으로 이 전투는 정신없이 진격하던 최전선의 롬멜과 7기갑사단 뿐만 아니라 독일군 수뇌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후술할 됭게르크가 발생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5월 22일, 허망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베이강은 역습 작전이 기재된 베이강 계획을 발표하나...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이강의 새로운 명령은 폐기된 가믈랭의 제12호 명령과 비교했을 때 그만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 그마저도 솜 강 남변의 3집단군이 제대로 된 역습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5월 23일, 프랑스군은 당일 예정된 역습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취소하기까지 했다. [* 이는 이틀전 비요트 장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발생한 지휘공백, 혼란이 원인이었다.] 한편 아라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BEF의 고트 장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접고 전 부대를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시킬 것을 명령했다. 5월 24일, 독일군은 북프랑스 일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한다. 이 때 연합군이 통제하는 항구는 됭케르크뿐이었다. 연합군 주력이 덩게르크 동쪽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격전을 치루느라 묶여있었기에, 됭게르크로 패주한 연합군들은 꼼짝없이 남쪽에서 다가오는 독일 기동부대에 의해 포위섬멸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바로 기적이 벌어진다. 됭케르크로 진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갑자기 정지해 버린 것. 바로 히틀러가 또 다시 진격 중지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자세한 정황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항목을 참조. 할더, 브라우히치 등 독일군 참모부의 핵심 인사들은 히틀러를 설득하여 명령을 취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연합군이 됭게르크 일대에 방어선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주력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5월 26일에야 정지 명령은 취소되었다. 3일 8시간 가량의 정지 명령이 연합군을 완벽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입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말은 육군 총참모부 서방육군분석과장으로 재직하던 울리히 리스 소장[* 1944년 12월 기준. 침공 당시는 중령이었다]이 남긴 말이다.[* 뒹케르크철수가 실패했다면이라는 전제는 2차 대전을 연구하는 군사학자들과 밀덕들 사이에서 여전히 열띤 토론을 부르는 존재다. 당시 영국은 1938년부터 공군을 위주로 차차 재무장을 시작했던 터라 육군이 매우 약했고 프랑스에 보내진 20만명의 원정군이 영국 육군의 핵심이자 사실상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섬멸됐다면 영국은 독일과 협상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홈 네이비로 독일 상륙군을 원천 봉쇄했을 것이고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주류학계는 영국이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선전하기 힘들었겠지만 강력한 홈네이비와 왕립 공군력으로 독일의 영국 침공을 봉쇄했을 것이라는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다만 저 30만 명은 영국의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 숙련병들이 몰려있었던 정예라서, 저들을 상실한 상황에서 육성한 군대는 한심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원 역사가 병장 10명에게 신병 100명을 던져준 상황이었다면, 영국 원정군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병장 1명에게 신병 300명을 던져주는 상황이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